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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03월 01일 ~ 1919년 03월 27일

    3.1 운동과 철도노동자 투쟁

    1919년 3월 1일, 일제의 무단 식민 지배 통치를 거부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만세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두 달여간 전국 230개 부와 군에서 200만 명 이상의 민중이 참여한 사상 최대 규모의 항쟁으로 확산되었다. 지식인들의 선언으로 시작된 3.1운동은 이후 농민, 노동자, 학생 등 기층 민중 모두가 참여하는 항쟁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들도 파업과 시위로 결합하면서 항쟁을 주도했다. 3월 9일부터 29일까지 20일간 파업과 운행 방해 투쟁을 경성전차 노동자들이 전개했고, 철도노동자들이 주도한 3월 22일 집회와 서울시내 행진에 이어 3월 27일부터 5일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소속 철도노동자들이 ‘조선독립’을 내건 역사적인 정치파업을 단행했다.

    1925년 12월 25일 ~ 1930년 02월 27일

    1925년 군산철도노동회 파업

    1925년 12월 25일 군산철도노동회 회원들은 일본인 운송업자들의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그 해결을 요구하는 하차작업 거부 파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임금인상을 쟁취하고 복잡한 임금체계를 개선했으며 균등한 분배가 진행되었다.

    1946년 03월 10일 ~ 1954년

    1947년 대한노총 운수부연맹 창립

    1947년 1월 17일 용산 부우회관에서 대한노총 운수부연맹 창립대회를 열고 초대위원장에 오차진을 선출하여 대한노총 산하 철도노동조합의 전국조직을 결성했다.

    1953년 10월 19일 ~ 1955년 05월 18일

    1955년 최초 단체협약 체결

    철도노동조합연맹은 한국전쟁 종료 직후인 1953년 10월 19일, 당시 교통부장관을 사용자로 하는 단체교섭권 협정에 따라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 철도노동조합연맹은 교섭 기초위원을 통해 수립한 협약 요구안을 가지고 수차례 노사교섭(협의회)을 진행하였고 1954년 7월 16일 제8차 교섭(협의회)에서 단체협약에 대해 잠정 합의했다. 이후 1955년 7월 22일 경주 경주극장에서 열린 철도노동조합연맹 제8차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단체협약안을 승인받고 1955년 8월 18일 교통부 회의실에서 사용자 대표 이종림 교통부장관과 노조 대표 김주홍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조인식을 치렀다. 이에 따라 최초로 행정부를 사용자로 한, 전문과 48개 조항으로 구성된 국유철도 단체협약이 체결되었다.

    1956년 08월 20일 ~ 1958년 10월 10일

    1956년 감원 반대 투쟁

    1956년 8월 이승만 정권이 정부조직 기구 개편에 따라 철도부문도 일반 공무원과 동일한 비율로 감원하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미 현장에서는 인원 부족으로 초과근무를 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문제를 제기, 투쟁이 시작되었다.

    철도노동조합연맹은 8월 20일 전국 조합장 회의를 개최하고 감원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여 감원의 조건과 요구안을 4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단체협약과 근로기준법에 의한 퇴직금 지급 둘째, 현재 비능률적인 인원을 대체하기 위한 교체정리 셋째, 동일 비율 실시 넷째, 피감원자에 대한 직업알선을 제시했다.

    1957년 07월 01일

    1957년 ITF(국제운수노련) 가입

    철도노동조합연맹은 국제 상급단체 가입을 위해 ITF(국제운수노련, International Transport Workers' Federation) 가입을 추진했다. 1957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ITF 집행위원회에서 가입이 승인되어 1957년 7월 1일부로 ITF에 정식 가맹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노조 중 최초로 국제노동조직에 가입한 사례였다. 철도노동조합연맹은 1959년 9월 16일부터 4일간, 오스트리아 짤스부르크에서 개최된 ITF 철도분과 철도노동자대회에 2명의 대표단(부위원장, 사무국장)을 파견해 최초로 국제회의를 참가했다.

    1960년 06월 30일 ~ 1961년 08월 05일

    1960년 한국철도기관차노동조합의 설립과 열차 안전 운행 준법 투쟁

    1960년 철도노동조합연맹의 부패와 어용성을 비판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새로운 민주노조 활동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기관사들이 중심이 된 한국철도기관차노동조합이 8월 5일 창립대회를 열고 출범했다. 창립 초기 2,300여 명의 조합원이 가입한 한국철도기관차노동조합은 노보 발행 등 조합원 사업을 통해 조직력을 갖추고 철도청과 교섭을 진행했다. 9월 30일 열차 안전 운행 준법 투쟁을 통해 교통부에 제시한 5대 요구사항을 관철시켰으며, 연가보상금 지급에 대한 요구 투쟁을 연이어 전개했다. 이후 철도청과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철도 현장 내 민주노조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5.16쿠데타 이후 포고령에 따라 강제 해산되었으며 철도노조의 유니언숍제도로 조직 경쟁에 밀려 조합원이 급감했다. 노동법 개악 이후 복수노조 금지조항에 따라 한국노총과 철도노조의 고소고발로 불법 노동단체로 규정되어 이후 위원장이 구속되고 소멸되었다.

    1961년 05월 23일 ~ 1962년 04월 17일

    1961년 대한노총, 철도연맹 강제 해산과 전국철도노동조합, 한국노총 출범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부 군인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 장면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군사정부는 4.19 혁명 이후 확대된 제반 민주주의 권리를 무력으로 짓밟고 폭력에 기반한 통치 조치를 취했다. 노동 현장에서는 군사정부 포고령에 따라 대한노총과 전국철도노동조합연맹이 5월 23일 이후 강제 해산되었다. 이어 6월 창설된 중앙정보부가 주도해 ‘기존 노동조합의 해체, 산별노조 체제로의 재편, 정치활동의 금지, 복수노조의 금지’를 핵심으로 하는 노동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노동조합 조직을 강제 재편했다. 이에 따라 8월 30일 창립대회를 통해 11개 산별노조로 편성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현재 한국노총)이 만들어졌다. 철도노동조합연맹 산하 10개 노조도 단일산업별노조 건설 방침에 따라 통합되어 8월 17일 ‘전국철도노조’로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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