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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 운동과 철도노동자 투쟁

    1919년 3월 1일, 일제의 무단 식민 지배 통치를 거부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만세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두 달여간 전국 230개 부와 군에서 200만 명 이상의 민중이 참여한 사상 최대 규모의 항쟁으로 확산되었다. 지식인들의 선언으로 시작된 3.1운동은 이후 농민, 노동자, 학생 등 기층 민중 모두가 참여하는 항쟁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들도 파업과 시위로 결합하면서 항쟁을 주도했다. 3월 9일부터 29일까지 20일간 파업과 운행 방해 투쟁을 경성전차 노동자들이 전개했고, 철도노동자들이 주도한 3월 22일 집회와 서울시내 행진에 이어 3월 27일부터 5일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소속 철도노동자들이 ‘조선독립’을 내건 역사적인 정치파업을 단행했다.

    목차
    처음으로
    배경
    철도노동자 투쟁 경과
    결과와 의미

    1. 배경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 이후 일제의 약탈은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의 땅은 일본인 지주들의 차지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회사령’을 제정해 회사의 설립과 운영은 총독부의 허가와 관리 아래 가능했고 언제든지 총독부가 해산시킬 수 있었다. 또한 삼림령, 어업령, 광업령으로 조선의 자원들을 약탈해 갔다. 당연히 조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일제에 대한 불만과 원성은 높아져 갔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경제위기와 전 세계적 사회혁명의 기운이 폭발하던 시절에,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를 배경으로 1910~1917년 한해 7~8건이던 노동쟁의가 1918년엔 50건에 달했고 파업 노동자도 4,500명으로 늘어났다. 조선 노동자들이 식민지 착취에 저항을 본격화하면서 3.1운동을 이끌었고 거리의 폭발적 항쟁은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이 주도해 1919년 8월에 경성에서만 26건의 파업이 발생하는 등 정점에 달했다. ‘조선 독립’이라는 정치적 요구와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생존권 요구가 결합된 당시 노동자 투쟁은 1919년에만 84건에 달했고 8,500명의 노동자가 파업하고 만세 시위에 나섰다.

    3.1운동이 시작되고 3월 2일 서울에서는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이후 출근을 거부했다. 3월 10일 이후에는 평소의 10%에 불과한 노동자만 출근해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3월 하순 들어 만세 시위자들이 무차별 체포, 검거되며 만세운동이 주춤해지자 노동자들이 이를 이어 투쟁했다.

    2. 철도노동자 투쟁 경과

    1919년 3월 9일 오전 시작된 경성전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3월 29일까지 20일 동안 계속되었다. 3월 10일 종로 4가에서 300여 명의 시위대는, 파업에서 빠져 전차를 몰던 운전수를 폭행하고 “왜놈에게 혹사 되면서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하루 속히 자살하라”는 선전문을 뿌려대고 곳곳에서 전차에 돌을 던지며 운행을 방해했다. 서울에서 평상시 운행되던 58대 가운데 무장한 일본군이 동승한 19대만이 운행되었다. 26일에는 20량의 전차가 시위대에 의해 대파되었다.

    일반 시민들의 시위가 소강상태에 빠질 무렵,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3월 22일 철도 기관수 차금봉 노동자 조직인 ‘노동회’(노동대회)가 주도한 ‘노동자대회’였다. 이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철도 노동자들이었다. 봉래(현재 만리동) 철도교차점 부근 음식점에서 아침을 먹으러 온 잡역노동자들과 부근에 모여 있는 전차 차장·공장 직공·자유노동자·일반 시민 700~800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일경이 이를 막아섰지만 만리동부터 경부선의 종착역인 서대문역을 지나 독립문까지 가두 행진을 벌였다. 소식을 듣고 온 시민들이 합류해 시위와 행진 대열이 늘어났다.

    3월 27일, 차금봉이 주도하여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 소속 남대문 기관구 기관사, 공작창과 조차부 등 용산역 주변에 일터를 두고 있던 조선인 철도노동자들이 투쟁과 시위에 나섰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경성관리국 소속 900명 가운데 철도노동자 800여 명이 참가해 서울역 앞에서 ‘조선 독립’을 내건 플래카드를 들고 ‘조선 독립 노동대회’를 진행하고 파업을 선언했다. 이 파업은 3월 31일까지 5일간 계속되었다.

    3. 결과와 의미

    3.1운동은 일제의 폭력적 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일제의 폭력적 지배 성격을 확인하고 항쟁을 통해 민중의 각성과 행동을 이끌었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독립운동과 노동자, 농민 기층 대중운동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농민들은 각종 농민단체를 만들고 소작쟁의를 벌였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 철도노동자들의 투쟁 이후 노동자들은 이듬해 전국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를 결성했고 1924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 건설로 이어졌다. 당시 노동자들은 ‘조선 독립’이라는 정치적 요구뿐 아니라 일본인 노동자와 이중삼중의 차별 속에서 기아와 빈곤 상태에 직면했기에 ‘임금인상과 생존권 보장’의 요구를 함께 내걸었다. 1919년 당시 파업 요구의 83%가 임금인상이었고 8시간 노동제 요구도 이때 등장했다.

    한편 3.1운동을 비롯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서 철도가 기여한 공로가 상당했다. 3월 1일 철도역이 있는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 전국 7개 주요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후 철길을 따라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시작된 운동 소식이 철도 노선을 따라 철도 정거장이 있는 중소도시로 확산되었고 주요 역은 시위 군중의 집결지이자 거점이 되었다. 4월까지 전국에서 매일 50∼60여 회에 이르는 만세운동이 있었고, 3월과 4월 두 달 동안 약 110만 명이 참가했다. 남대문역·수원역·노량진역·영등포역 등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만 약 47만 명이 모였고, 충청도는 대전역을 중심으로 약 8만 명이 합세했고 현재 북한의 평양역과 신의주역 등지에서도 약 21만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또한 철도 출신의 다수 독립운동가가 활동했다. 3.1운동 당시 철도노동자 파업과 시위를 이끈 차금봉은 1898년 서울에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서울역 기관차 화부로 취업해 철도원 생활 6년 만에 기관사가 되었고 3.1운동이 발생하자 용산 철도공장과 남대문 기관구,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철도노동자들을 규합해 대대적 시위를 기획했으나 회사에 발각되어 해고되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3월 22일 대회와 가두 행진, 3월 27일 집회와 5일간의 철도노동자 파업을 주도했으며 이후 건설된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을 이끈 식민지 노동운동 지도자로, 또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활동했다.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1929년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고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는 1919년 용산역에 임시직으로 역부로 취업해 이후 전철수, 연결수로 1924년까지 철도원 생활을 했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이길용 지사도 경성관리국 소속으로 철도수송업무를 했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 투신 전 일본이 운영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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