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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11월 2일 ‘조선철도노동조합’의 창립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해방 직후 노동자들은 전국적 조직 건설에 매진했다. 1945년 9월 26일 첫 회동을 시작해 28일 전평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0월 10일 18명의 조직책을 전국 13도에 파견했다. 조직 활동의 결과, 11월 1~4일 16개 산별노조를 결성하고 11월 5~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결성했다. 11월 2일에 결성된 조선철도노동조합은 전평에 가입해 중심 조직으로서 활동했다.

    목차
    처음으로
    배경
    조선철도노동조합 창립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창립

    1. 배경

    해방 직후 남한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중적 열망과 사회·경제적 혼란이 복합, 증폭되는 시기를 맞이했다. 독립 이후 남한에서는 노동운동이 급속도로 조직화되고 성장하였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공장 폐쇄, 조업 단축, 실업 및 전재민의 증가, 물가 앙등과 이로 인한 실질 임금의 감소 등 제반 혼란은 아래로부터 노동운동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제공했다.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의 경우 8·15 이후 노동자들은 일본인 사업체에 대한 접수운동과 함께 이들 업체에서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해 1945년 11월 4일 현재 16개 산별노조 관할 728개 사업장에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들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된 사업체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는 9만명에 달했다. 전산업부문에서 노동자조직의 결성과 잇따른 노동조합의 설립, 연합과 통합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1945년 11월 조선철도노조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에 이르게 된다.

    2. 조선철도노동조합 창립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5일에서 9월 초까지 경성(서울)지역에서 지역 단위의 산업별 노동조합인 조선철도노조가 다른 산업부문(화학·금속·기계·체신·토목·출판·섬유 등)의 노조와 더불어 결성되었다. 이 노조들은 9월 22일 ‘경성노조협의회’를 결성했다.

    대구지역에서도 철도를 비롯해서 금속, 출판, 운수, 섬유, 자동차, 토건, 화학, 통신, 식량 등의 산업별노조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경북지역의 여러 노조들과 함께 10월 24일에 ‘조선노조대구지구협의회’를 조직했다.

    부산철도공장의 노동자들도 10월 8일 부산철도노조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강령으로 ‘△ 우리는 상조하여 이익옹호를 위한 단결을 기도함 △ 우리는 우리의 통일적 노동전선을 위한 운동을 기도함 △ 우리는 우리의 노예적 지위로부터 자유해방과 완전한 인간평등을 위한 투쟁을 기도함 △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지위 균등을 위한 투쟁을 기도함’ 등을 내세웠다.

    마침내 11월 2일 조선철도노동조합이 출범했다. ‘조선철도노조’의 위원장은 이성백, 부위원장은 오병모였다. 1945년 11월 4일을 기준으로 조합원은 34,728명이었고 분회는 45개였다. 조합원 수는 1946년 2월에는 62,439명(남·북조선 전체), 1947년 4월엔 30,981명, 1947년 9월엔 32,715명, 1948년 2월엔 20,672명이었다.

    조선철도노조는 31명의 대의원을 파견해 11월 5~6일 전평 결성대회에 참여했다. 조선철도노조 조합원 수는 16개 산업별 노조원 21만여 명 중에 가장 큰 규모였다. 조선철도노조의 산업별지부가 설치된 곳은 신의주부터 부산까지 20개였다.

    3.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창립

    1945년 9월 26일 철도를 비롯한 금속·화학·교통·섬유·토건·출판·교통운수·연료·피복 등의 산업부문 노동자 대표 51명이 경성토건노조 사무실에서 회합하여 준비대표자회를 개최하였고 9월 28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전평준비위원회’는 전평을 결성하기 위해 10월 10일 18명의 조직책을 전국 13도에 파견했으며 조직 활동의 결과 10월 26일 전국의 조직된 노동자 21만여 명 이상을 대표한 산별노동자 대의원 515명이 서울에 모여 1945년 11월 1~4일에 16개의 전국적 산별노조를 결성했다.

    1945년 11월 5~6일 경성(서울) 중앙극장에서 전평 창립대회가 진행되었다.

    전평은 창립선언에서 “8.15 이후 전국 각 산업 중요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노동운동은 자연발생적·지역적·수공업적 혼합형의 조직체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전국적으로 정연한 산업별적 조직으로 체계화·강력화시켜 … 여러 개의 산업별 단일노동조합이 총집결함”으로 설립 목적을 밝히고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유급휴가제, 완전고용제, 사회보험제, 단체계약권,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파업의 자유, 노동자의 공장관리, 노농동맹, 인민공화국 지지, 자주독립,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 등” ‘20개조 일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이로써 해방 직후 ‘식민지 유산의 철폐, 생존권 보장, 정치·경제적 민주주의 확대’를 목적으로 아래로부터 노동대중의 분출하는 요구를 대변하는 가장 강력한 대중조직으로서 미군정의 반민중정책에 맞서나간 노동운동 조직이 탄생하게 된다.

    전평은 철도·교통운수·금속·화학·섬유·식료·광산·어업·통신·전기·토건·조선·목재·출판·해원·일반봉급자 등 16개의 전국적 산업별 단일노동조합과 각 산업도시에 하부조직인 산업별 지부, 그 아래 1,194개의 분회가 속해 있었다. 서울·인천·대전·대구·부산·마산·군산·광주·목포·삼척·전주의 11개 도시에 지방평의회를 두고 그 지방의 산업별 지부를 총괄하도록 했다. 1946년 6월에는 8개(경기,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경남, 경북, 강원)의 도평의회를 설치하고 지방평의회를 소속시켰다. 1945년 11월 30일 평양에 결성된 전평 북조선총국은 1946년 4월 중순 이후 전평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북조선노동총동맹이 되었으며 5월 하순에 북조선직업총동맹으로 개편되어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전평은 전국 212여만 명의 노동자들 가운데서 10% 정도인 21만여 명이 참가하였고 불과 3개월 후인 1946년 2월 15일 시점에서는 235개의 지부 및 1,676개의 분회에 574,479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같은 급속한 성장의 배경에는 미군정 아래 파탄난 생존권 보장에 대한 대중적 요구와 일제 강점기부터 지속된 노동운동과 독립운동(변혁운동)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전평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조직운영을 표방하였다. 1945년 11월에서 1946년 3월까지의 전평 조직의 운영자금은 90%가 조합비와 노동자들의 의연금이었고 8.6%가 부채였다. 조직 운영에 있어서도 대의원은 노동자대회나 조합원 총회에서 선출하고 그들이 집행위원을 선출하고 집행위원회가 결정한 의사를 평조합원에게 지시하는 민주집중제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

    ※ 참고자료

    - 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현장에서 미래를. 2002.
    - 전국철도노동조합 역사편찬위원회, 『철도노동운동 약사』, 2009.
    - 김병구·지영근, 『만화로 보는 철도 이야기: 철도노동운동사』, 갈무리, 2017.
    - 김무용, 『해방후 9월 총파업의 지역별 전개와 성격』, 역사연구 제8호, 아세아문화사, 2000.
    - 전국철도노동조합 역사편찬위원회, 『철도노조 80년사 1』, 한내,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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