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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11월 17일 ~ 1990년 12월 21일

    1990년 구로열차지부 준법운행 투쟁

    1990년 11월 17일 지하 청량리역에서 전철 승객의 가방을 끼운 채 의정부발 인천행 전동열차가 출발해 승객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청량리역은 곡선 승강장으로 차장실에서는 사고 발생 출입문이 보이지 않았고 역무원 인원 감축으로 승강장 안전이 방치된 상황에서 발생한 사고였다. 그런데 이 사고 책임을 물어 구로열차사무소 소속 기관사가 구속되었다.

    기관사 구속에 항의해 구로열차지부는 11월 20일 정오, 차장 비상총회를 개최해 준법운행 투쟁을 결의하고 당일인 20일부터 안전 수칙에 따른 ‘출입문 개폐시간 지키기’ 등의 방식으로 준법투쟁에 돌입하였다. 20~21일 양일간 지부 조합원 전원이 참여해 벌인 준법투쟁의 파급력은 컸다. 2일차에는 1시간 가까이 전동열차가 지연 운행되어 저녁 구로역에서는 승객들이 전동열차의 유리창을 깨는 등 원성과 항의가 폭발했다.

    21일 새벽 서울지방철도청장이 긴급 면담과 노사교섭을 제안해 열린 교섭에서 ‘곡선 승강장 안내원 배치, CCTV 확대, 형사처벌 철회와 구속자 조속 석방 철도청 적극 노력’ 등 지부의 요구안이 대부분 수용되어 준법투쟁을 마무리했다.

    1992년 03월 ~ 1993년 02월

    1992년 공선협과 서민협 활동, 철도 민주노조운동의 확산과 현장투쟁

    1988년 파업 이후 기관사들을 중심으로 1989년 전기협을 결성해 노조 민주화를 위한 현장 활동이 본격화되었고 기관차지부 외 차량, 운수 등 여러 직종에서도 민주노조 건설 투쟁이 시작되었다.

    민주진영 활동가들은 어용노조에 대항하고 노조 민주화를 위해 1992년 전국철도노조 총선거에 “철도노조 민주화를 위한 공동선거대책협의회(공선협)”을 구성하여 선거에 참여했다. 철도청의 부당전출 협박, 어용노조의 조직적 방해를 뚫고 수도권 10개 지부에서 공선협 소속 민주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 이후에는 선거 공동대응을 통해 당선된 지부들과 활동가들이 ‘서울민주지부협의회’를 구성하였다. 서민협은 기관지 ‘그날이 오면’을 발행하고 공동으로 간부 교육사업을 펼치는 등 철도노조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1993년에는 서민협이 주축이 되어 서울지방본부 위원장 불신임투쟁을 진행하고 보궐선거를 통해 유광배 민주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집행부는 3개월의 보궐 잔여 임기 후 치러진 선거에서 어용 대의원들의 조직적 결집과 표몰이를 당해내지 못해 패배했다.

    한편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철도 민주노조운동은 전국 곳곳에서 활발한 현장 투쟁으로 세력을 키우고 기반을 다져나갔다. 구속자 가족후원회 해체 압력에 맞선 현장 투쟁, 망우역 대기시간 단축 투쟁, 기관사와 검수원 인력증원 요구 투쟁, 정민효 기관사 장례투쟁, 구로열차지부 준법투쟁 등 철도청의 폭압적 노무관리와 어용노조의 탄압 속에서도 조합원 중심의 현장 투쟁을 진행하였다.

    1994년 09월 ~ 1996년

    1995년 철도해고노동자회와 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 활동

    1995년 9월, 전기협 파업으로 구속되었다 석방된 해고자들은 수련회를 열어 ‘철도노조 민주화와 해고·부당전출자 원직복직’을 목적으로 한 해고자조직을 결성하기로 했다. 이어 9월 28일 서울 영등포산업선교회 강당에서 해고자 63명이 모여 ‘철도해고노동자회’(철해노)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철해노는 결성 이후 철도청과 지방철도청 순회 항의시위와 농성, 국정감사 증언, 철도노조 항의방문을 통해 해고자와 부당전출자 원직복직을 촉구하였다. 철해노는 어용 철도노조와 철도청의 해고자 후원사업 방해와 탄압, 생계 문제에 봉착해 1996~1997년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1998년 김대중정권 집권 초기부터 노사정위원회 점거와 단식농성 등 대정부 원직복직 요구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2000년, 2001년에는 직선제공투본과 민주선본 활동 등 노조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한편 원직복직과 함께 철도노조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전 직종의 민주세력들이 참여하는 노조 민주화 투쟁조직이 요구되었고 1995년 3월 25일 대전 한남대에서 철도 내 모든 직종이 참여하는 ‘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철도노민추)를 결성하였다. 철도노민추는 1995년 철도노조 총선거 승리를 당면 과제로 결의하고 서울지방본부 위원장 후보와 전국의 민주파 지부장 후보 지원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선거 결과 서울지방본부에서 과반수에 가까운 대의원을 확보했으나 당선에는 실패했다. 민주세력은 이후 ‘전국기관차지부장회의’를 구성했고 1996년에는 「새벽철길」 소식지 격주 발행과 철도노조의 일방적 조합비 인상에 맞서 ‘조합비 인상 반대 범대책위원회’ 투쟁을 조직하였다. 철도노민추는 철도노조 민주화에 대한 방향과 활동방식에 대한 내부 이견과 활동상의 어려움으로 이후 여러 현장운동 조직으로 분화되었다.

    1995년 11월 27일 ~ 2001년 08월 09일

    1995년 철도노조민주화지원연대 활동

    철도노조민주화지원연대(지원연대)는 1995년 하반기 준비위 회의를 거쳐 1995년 11월 27일 창립총회를 열고 출범했다. 철도노조 민주화를 위한 공동 지원 연대조직의 위상과 성격을 가졌다. 1994년 전기협 파업 이후 철도청의 무차별 징계 해고를 통한 폭압적 노무관리가 강화됐고, 어용 전국철도노조는 조합원 징계와 제명 등의 탄압을 자행해 철도노조 민주화 활동은 대단히 취약한 조건과 상태 속에서 진행되어왔다.

    지원연대는 1995년 창립한 이후 철도노민추 활동과 재정 지원, 전국철도노조 조합비 인상 반대 투쟁, 3중 간선제 폐지와 민주파 활동가 선거운동 지원, 현장 투쟁에 결합한 연대투쟁을 벌였다. 특히 철도노조 민주화 선전과 회원들을 대상으로 정기소식지 발행 등 선전사업과 함께 철도 해고자들을 대상으로 한 생계와 활동 지원사업에 집중했다. 1998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회원 관리의 어려움과 철도 현장 투쟁의 소강으로 인해 회원 감소와 함께 활동력이 저하됐다. 그럼에도 2000년 1월 14일 대법원의 3중 간선제 위법 판결 이후 철도노조 직선제공투본 지원 연대활동의 초동 역할을 담당했으며 2000년 4월 이후에는 철도지원공대위 활동을 주도했다. 2001년 마침내 철도 현장에 민주노조가 건설되면서 지원연대도 노조 민주화 목표를 이뤘다는 판단 아래 같은 해 8월 9일 해산총회를 열고 6년간의 활동을 마감했다.

    1996년 05월 23일 ~ 1996년 10월 24일

    1996년 조합비 인상 반대 직선제 요구 투쟁

    전국철도노조가 1996년 5월 23일 수안보온천 상록수 관광호텔에서 정기대의원대회를 열어 일방적으로 0.5%의 조합비를 인상했다. 조합원의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조합비를 인상한 데다 관광호텔에서 대회를 개최해 지방본부 위원장에게 고급승용차(소나타Ⅲ)를 지급하기로 하자 조합원들의 분노가 촉발되었다.

    철도노민추가 소식지 ‘새벽철길’에서 이를 폭로하자 조합원 스스로 조합비 공제 거부 운동이 시작되었다. 6월 13일에는 12개 지부와 지구를 중심으로 ‘조합비 인상 유보와 조합원 찬반투표를 요구하는 전국철노 서울지방본부 범지부 대책위원회(범대위)’가 결성되었다.

    범대위는 6월 27일 300여 명이 참석한 항의 집회를 거쳐 7월 15일 27개 지부가 참여한 ‘조합민주주의의 실현과 불법적인 조합비 인상 철회를 위한 전국 범대위’로 발전했다. 이후 세 차례의 조합원 항의 집회, 리본달기, 임시대의원대회 소집 요구, 부당노동행위 진정, 소송제기, 공청회 등을 통해 어용 전국철도노조의 부도덕성과 비민주성을 폭로했다. 범대위는 6월 13일부터 두 달여 간 조합비 인하뿐 아니라 직선제 선거 요구를 걸고 조합원 대상 반대 서명운동을 벌여 과반이 넘는 조합원을 조직해 투쟁의 명분과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범대위 활동은 전국철도노조와 철도청의 공모와 탄압에 가로막혔다. 철도노조는 10월 중앙위원회에서 서명운동을 주도한 활동가들에 대해 조합원 자격 제명 5명, 권리정지 3년 3명, 권리정지 2년 3명, 그 외 경고 징계를 내리고 7개 지부를 사고지부 처리했다. 철도청은 조합비 인상 반대 집회 참여와 조합원의 서명운동을 막으라는 지시와 홍보물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을 징계위에 회부했다. 탄압과 함께 이후 대응에 대한 계획과 전망 부족으로 인해 범대위 활동은 중단되었지만, 투쟁 중 제기한 직선제에 대한 법적 소송은 2000년 3중 간선제 위헌 판정을 이끌었고 이후 직선제 규약개정 투쟁과 민주노조 건설에 크게 이바지했다.

    1998년 12월 10일 ~ 1999년 09월

    1998년 민주파 현장조직들의 활동과 통합

    철도 현장 내 철도노민추, 철도발전연구회, 운수마을로 분리되어 성장하던 철도 활동가조직은 19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철도 현장에 불어닥친 철도 민영화 추진과 전국철도노조의 무대응에 위기의식을 느낀 현장 간부와 활동가들의 통합 요구에 직면했다. 마침내 1998년 여름부터 1년여간의 통합 논의 끝에 1999년 5월 23일 대전 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철도민주노조추진위원회(철민추)’로 조직을 통합했다. 철민추는 민주노총 공공연맹에 가입해 민주노조 지향성을 명확히 밝혔으며 철도 민영화 저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5개 지역위원회 활동을 기본으로 매월 기관지 발행, 교육사업, 지부 현장투쟁을 지원했고 2000년 공투본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2001년 민주철도노조 건설 이후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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