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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년 조선철도노조·전평 1946년 9월 총파업

    1946년 9월 24일 조선철도노조는 △ 쌀 배급 △ 해고·감원 반대 △ 임금인상 △ 민주주의 노동법령 실시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철도 파업은 부산지역에서 시작되었는데 투쟁의 여파가 중앙으로 확대되었고, 중앙에서 다시 지역으로 확산되는 방식으로 파업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지역별로 철도를 중심으로 하여 전평의 주도 아래 각 산업에서 동조파업을 했으며 일반 대중들의 쌀 배급 증대를 요구하는 대중투쟁으로 확대되었고 다시 대중투쟁에 힘입어 각 사업장에서 전평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미군정은 9월 30일 전차와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경찰대 3,500명, 대한노총, 대한민청, 대한독립촉성청년회 등 우익 테러단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용산기관구의 철도 파업투쟁본부를 습격했다. 이 습격으로 3명이 사살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중 중상자가 40여 명이 되고 서울에서만 1,800여 명이 재판도 없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조선철도노조와 전평은 이 파업으로 간부 및 조합원들이 대량 살해·구속됨으로써 조직이 전반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반면 대한노총은 파업의 진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조직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각 직장에서 전평의 주도권을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다.

    목차
    처음으로
    배경
    철도노동자들의 쌀 배급 요구
    9월 총파업
    철도 파업의 무력 진압과 최초의 노사협정서
    9월 총파업 이후 1947~48년 파업과 투쟁
    9월 총파업의 결과와 의미

    1. 배경

    1945년 8월 15일, 해방 공간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이라는 정치적·민족적 과제 실현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전평과 조선철도노조는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협조노선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총재산의 80%에 해당하는 구 일본인 소유재산을 일본의 전쟁배상으로 접수하고, 남한을 미국의 과잉생산 상품의 시장으로 삼고자 생산을 정지하거나, 또는 그 시설을 파괴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생산시설의 태반이 가동 중단되었고 실업, 반실업의 수는 500만 명이 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상승하였다. 대중의 생활은 무참히 파괴되어 갔고, 쌀 확보 등 생존을 위한 처절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1946년, 해방이 된지 1년이 지났다. 1946년의 물가는 1944년에 비해 92배로 폭등했으나 임금은 그에 비해 1/13밖에 오르지 않았다. 1946년 1월에 쌀 한 말에 180원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올랐다. 농민들은 일제 식민지시기에도 없던 하곡(보리쌀) 공출까지 강요당하자 불만이 높아졌다. 9월 철도파업이 시작되기 전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24건의 파업에 노동자 3천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농민들은 7월부터 하곡(보리쌀)수집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9월 13일 경성철도공장의 3,000여 노동자들은 급등하는 물가와 심각한 식량난 때문에 종전과 같은 생활비의 절반도 안 되는 급료로는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쌀 배급과 임금인상·대우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을 서면으로 미군정청 운수부 철도국장 맥클라인에게 제출하였다. 경성공장 노동자들의 궐기에 호응하여 전기수선장, 건축구, 통신구, 부산지구, 전남지구 철도노동자들도 각각 직장대회를 소집하고 일급제 반대 외 4항목 요구투쟁에 보조를 함께했다.

    운수부장에게 제출한 요구서에 대한 답변이 없자, 조선철도노조는 ‘지방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남조선 철도종업원 대우개선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기존의 요구 외에 ‘급식을 종전과 같이 계속할 것,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 등을 덧붙여 운수부장에게 제출하고 산하 노동자들에게 24일부터 총파업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2. 철도노동자들의 쌀 배급 요구

    철도노동자들은 1946년 3월부터 이미 경성을 중심으로 ‘쌀 확보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미군정청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이를 고무하는 격문을 살포하기도 했다. 3월 29일 철도당국은 서울열차 식당 노동자 38명을 무단 해고했다. 열차식당분회에서는 ‘강제해고반대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철도당국은 “노선 운행 km당 필요 인원”이 적정인원에 비해 초과한다는 이유를 들어 38선 이남 전체 철도 3만 5천여 명 노동자 가운데 1만 5천여 명의 대량해고를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철도노조가 결성된 지 10개월 후인 1946년 9월 총파업 당시 38선 이북을 제외한 남쪽 철도 조합원 수는 32,715명으로 조직률은 94%에 이르렀고 1947년 4월에는 9월 파업 이후로 약간 줄었지만 34,885명 중 조합원 수는 30,981명으로 조직률은 89%에 달했다.

    1946년 4월에 이르러 쌀 획득 투쟁과 해고반대 투쟁은 그 열기를 더해 경성공장 보선구, 운수본국 등 각 직장의 대표자 50여 명이 회합하여 ‘해고반대공동투쟁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열차식당 노동자들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연서명 진정서를 미군정 당국에 제출하였다.

    6월 들어 부산철도사무소 관할 공장 8천 노동자들을 대표한 10구 9과 3역 대표자들은 노동자들의 생활난에 대한 긴급대책을 세우기 위한 좌담회를 열어 부산시 당국과 교섭하는 한편 요구조건을 모아 서울로 갔다.

    7월 들어서면서 쌀 배급 요구와 관련한 궐기는 각 직장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청량리 기관구, 성동 기관구, 성동역 경성기관구, 경성사업장, 보선구, 전기수선장, 기술연구소 등에서 직장 대회가 속속 개최되었다.

    9월 13일 경성철도공장의 3,000여 노동자들은 급등하는 물가와 심각한 식량난 때문에 종전과 같은 생활비의 절반도 안 되는 급료로서는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쌀 배급과 임금인상·대우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을 서면으로 미군정청 운수부 철도국장 맥클라인에게 제출하였다. 경성공장 노동자들의 궐기에 호응하여 전기수선장, 건축구, 통신구, 부산지구, 전남지구 철도노동자들도 각각 직장대회를 소집하고 일급제 반대 외 4항목 요구투쟁에 보조를 함께했다.

    운수부장에게 제출한 요구서에 대한 답변이 없자, 조선철도노조는 ‘지방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남조선 철도종업원 대우개선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기존의 요구 외에 ‘급식을 종전과 같이 계속할 것,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 등을 덧붙여 운수부장에게 제출하고 산하 노동자들에게 24일부터 총파업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파업은 부산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부산 철도노동자들은 일찍부터 당국에 식량문제를 중심으로 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였지만, 미군정이 일급제를 실시하고, 특히 9월 들어 급식제를 중단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부산 철도사무소는 급식제를 다시 실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기금 융통 문제로 시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부산 철도노동자들은 극도의 식량난 속에 가족 생계까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부산 철도노동자들은 미군정의 일급제 실시에 반대하는 서울의 경성철도공장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부산 철도공장 종업원 대표는 철도사무소를 방문하여 경성 철도노동자를 지지하며 행동을 함께하고 21일까지 회답이 없으면 파업을 단행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3. 9월 총파업

    9월 23일 0시, 부산지구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은 부산발 상행선의 모든 열차 운행을 중지하고 파업을 단행하였다. 부산 파업을 시작으로 하여 24일 09시에 경성지구가 파업에 돌입하면서 철도파업은 전면적으로 확대되었다.

    “우리 4만 철도종업원은 우리 철도가 또다시 어느 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와 침략의 무기가 되게 함이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와 독립과 부강의 무기가 되게 하기 위하여서 참다못하여 총파업에 들어갔다. 쌀 두 말 값의 월급과 강냉이 죽으로 연명하여 그 뿐만 아니라 미국에 의존하여 국내생산을 축멸시키고 종업원의 대량해고감원까지 착착 진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20만 가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단연 파업으로서 무성의한 당국자의 반성을 촉구하기로 하였다. 파업은 파괴가 아니다. 우리들의 요구는 정당하고 건설적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 1946.9.24. 조선철도노조의 파업성명서

    요구조건
    1. 1일 쌀 배급을 노동자에게는 4홉, 가족에게는 1일 1인당 3홉씩 배급할 것 2. 일급제 반대 3. 임금을 인상할 것 4. 물가수당 월 2,000원, 가족수당 1인당 600원 5. 해고, 감원 반대 6. 급식을 종전과 같이 계속할 것(종전대로 점심밥을 줄 것) 7.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
    1946년 9월 24일
    경성철도 종업원 대우개선투쟁위원회 총본부 대표 오병모, 남경우, 정규창

    서울은 9월 24일부터 14,949명의 철도노동자가 파업을 단행하고 농성을 벌이면서 기차 운행이 정지되었다. 서울의 철도파업은 전국으로 파급되어 38선 이남의 철도운행이 모두 중지되었다. 경기인천지역, 부산지역, 대구경북지역, 호남지역에서 각 도시, 역을 중심으로 파업과 농성이 연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9월 30일 미군정청의 무력 진압 이후에도 지역별, 지구별 파업이 10월까지 이어져 전북 이리지역의 경우 파업과 재파업을 반복해 10월 10일에 ‘체포면제, 임금인상, 식량배급 확대’ 등을 합의하고 마무리하였다.

    철도 파업은 이를 호응하는 동정파업·동맹파업으로 확대되었고, 26일 전평은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 서명으로 ‘총파업 선언서’를 발표해 생존을 위하여 궐기하자고 호소하였다. 전평의 이러한 방침에 따라 9월 총파업에 참여한 남한 전체 노동자는 472건의 파업과 함께 27만 1천388명에 이른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은 전평의 총파업과 함께 타산업 노동자들의 연대파업을 불러 일으켰고, 여기에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비롯하여 일반 대중이 참여하는 거리시위와 투쟁으로 발전해 갔고 3·1운동 이후 가장 큰 민중항쟁인 ‘10월 인민항쟁’을 촉발시킨 도화선이 되었다.

    4. 철도 파업의 무력 진압과 최초의 노사협정서

    미군정은 9월 30일 전차와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경찰대 3,500명, 대한노총, 대한민청, 대한독립촉성청년회 등 우익 테러단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용산기관구의 철도 파업투쟁본부를 습격했다. 이 습격으로 3명이 사살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중 중상자가 40여 명이 되고 서울에서만 1,800여 명이 재판도 없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한편 전국 도처에서 테러단들이 총검으로 파업 현장을 습격하여 무자비한 파괴를 하는 폭력 행위가 이어졌다. 남조선 대부분의 신문은 출판노조의 파업으로 발행이 정지되고, 교통, 운수는 물론 전신, 전화도 대부분 기능이 상실되고 중요한 공장들도 생산이 정지되었다.

    조선철도노조와 전평은 이 파업으로 간부 및 조합원들이 대량 살해·구속됨으로써 조직이 전반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반면 대한노총은 파업의 진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조직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각 직장에서 전평의 주도권을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다.

    한편 철도파업 투쟁의 결과 46년 10월 14일 대한노총 전진한 위원장 배석 하에 대한노총 산하 철도경성공장 지부연맹 오차진 등은 미군정청 운수부장과 전평의 요구사항과 비슷한 내용으로 노사협정서를 맺는다. 조선철도노조의 조직적 피해는 지대했지만 철도 최초의 노사협정서가 맺어졌다. 핵심쟁점인 대규모 정리해고는 철회되었다. 일급제는 월급제로 되돌려지고, 쌀 배급과 급식이 실시되었다.

    노사협정서
    1. 점심은 1식 3원에 공급한다. 100명 이상 종업원이 있는 곳은 식당을 설치한다. 2. 3년 이상 근무한 자에게는 구간제 패스를 발급하고, 5년 이상 근무한 자에게는 전 노선 패스를 지급한다. 3. 일급제를 준월급제로 실시한다. 4. 1946년 10월 1일부터 준월급제를 실시하며, 물가수당은 230원 인상하고, 본봉은 200원 인상한다.(임금이 22% 내지 66% 인상됨) 5. 식량 배급은 시민으로서의 2홉 3작의 배급과 운수부에서 2홉과 점심식량 1홉을 합하여 5홉 3작의 식량을 배급한다.
    1946년 10월 14일
    미군정청 운수부장 코넬손 철도종업원대표 심장섭, 김용심, 오차진

    5. 9월 총파업 이후 1947~48년 파업과 투쟁

    1947년에 접어든 후에도 남한의 제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쌀 부족에 의한 기근과 실업문제 등은 전년도에 못지않게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평은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함께 내걸고 제2차 총파업을 일으켰다. 경제적 요구사항은 ‘1일 4홉의 쌀 배급 실시, 실업자에게 직업 제공, 가족수당 인상, 생활 확보’ 등이었다. 정치적 요구는 ‘구속된 전평 간부의 즉각 석방, 노동운동의 자유 보장, 경찰의 중립화, 테러단 즉시 해체’ 등이었다.

    47년 3·22 파업이 단행된 날, 남조선 철도해고반대투쟁위원회 명의로 선전물이 배포되고 오전 7시부터 경부 본선의 열차운행을 5시간 중단시켰으나 곧바로 경찰에 연행됐다. 이미 파업을 예견한 철도 당국과 대한노총 계열 노동조합의 사전 봉쇄로 대부분의 철도 조업중단 투쟁은 조기에 끝났으나 반대로 지방은 거의 전 지역이 파업에 참여하였다. 한편 교통노조 공동투쟁위를 주도한 조선철도노조는 46년 9월 총파업때 가장 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그 조직이 대부분 파괴되어 3·22 파업의 주력이 되지 못했다. 3·22 파업투쟁은 50여만의 조직 노동자와 17여만의 농민, 8만여의 학생, 시민이 참가하고 각 중요도시에서 데모행진을 하며 파업투쟁을 하였다. 서울, 부산, 인천, 광주, 부평, 대구 등 주요 도시, 공업지대에서 일제히 파업이 단행되었다.

    미군정청은 전평 간부를 비롯한 노동자 2,076명을 검거, 투옥하는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소유공장, 소위 적산을 미군정이 관리하고 있는 공장 등에 근무하는 전평노동자들이 군정청 지령으로 해고되었다.

    1947년 7월부터 사실상 불법화된 전평은 48년에 들어와서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미군정청에 의해 전평 활동이 불법화된 후 진행된 48년 2·7 구국투쟁과 5·8 남조선 단선·단정 반대 총파업은 이미 노동조합의 상당한 부분이 대한노총 산하로 편입되어 통제되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조직할 수 없었지만, 정치파업으로 전국 각지에서 봉기로 발전하여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2·7 투쟁은 48년 2월 8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위해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이 입국하는 것을 반대하는 정치적 파업이었다. 철도에서는 서울지구에서 60%가 참가하였고, 부산에서 3,000명, 경북 철도 보선구에서 250여 명을 선두로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리에서는 5대의 기관차가 운휴되고, 여수에서 철도, 조운 등 5,000여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하고, 대전에서는 14대의 기관차가 운휴되었다. 2·7 투쟁 이후 혹심한 탄압을 받던 전평은 전국적 규모의 무장봉기로 진행된 5·8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5·8 총파업 이후 전평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대한노총에 의한 노동조합 주도권 탈취가 마무리되었다. 

    6. 9월 총파업의 결과와 의미

    해방 후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열망이 분출되고 있었으나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들의 삶의 조건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고, 철도노동자들은 대량해고의 압박 속에 놓여 있었다. 일급제 실시와 급식 중단으로 생존권이 벼랑 끝에 몰린 철도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과 저항이 필연적이었고 엄청난 희생이 따랐지만, 생존권 요구를 일정하게 쟁취할 수 있었다.

    철도 파업은 전평 총파업으로 확산, 각 산업의 동조파업으로 전개되었으며, 민중의 쌀 배급 증대를 요구하는 대중투쟁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철도노조는 철도노동자 최초의 노동조합으로서 지역별 조직을 기반으로 한 전국적 산별 단일노동조합이었다. 조합원수는 32,715명으로 95%의 높은 조직률을 가진 해방 후 결성된 대표적인 노동조합이었다. 간부역량 또한 전평 집행위원의 14%를 차지할 만큼 높고, 조합원의 지지도와 투쟁력 또한 높았던, 철도노조 역사상 가장 투쟁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이었다. 1945년 11월 2일 창립되어 48년 5월 파업까지 2년 7개월 동안 수많은 조합원과 간부가 투옥·해고되었고 살해되기도 했지만, 역동적인 해방 공간에서 정국의 주역으로 활동을 펼쳤다. 46년 9·24 파업 이후에도 47년 3·22 파업, 48년 2·7 파업과 5·8 파업 등 4차례의 파업은 ‘쌀을 달라’는 경제적 목적의 파업부터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정치적 파업으로까지 이어졌다. 46년 9월 파업의 요구사항은 ‘정리해고 철회, 일급제 유지, 쌀값 인하’ 등 일정 정도 관철되었지만 이후 진행된 47년, 48년 파업은 모두 실패한다.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을 바라던 철도노동자들의 꿈도 좌절되었다. 미군정과 대한노총, 우익청년단들의 폭력 탄압으로 인해 자주적인 노동조합은 파괴되고 이 과정에서 대한노총이 설립되었으며, 이들이 주축이 되어 1947년 1월 18일 철도 현장에 대한노총 운수부연맹이 설립되었다. 결국 조선철도노동조합은 48년 5·8파업 이후 전평과 함께 사실상 해체된다.

    ※ 참고자료

    - 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현장에서 미래를. 2002.
    - 전국철도노동조합 역사편찬위원회, 『철도노동운동 약사』, 2009.
    - 김병구·지영근, 『만화로 보는 철도 이야기: 철도노동운동사』, 갈무리, 2017.
    - 김무용, 『해방후 9월 총파업의 지역별 전개와 성격』, 역사연구 제8호, 아세아문화사, 2000.
    - 김병구, 「김병구의 철노역정 2 ‘두 개의 창립기념일’」
    - 전국철도노동조합 역사편찬위원회, 『철도노조 80년사 1』, 한내,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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