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해방 공간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이라는 정치적·민족적 과제 실현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전평과 조선철도노조는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협조노선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총재산의 80%에 해당하는 구 일본인 소유재산을 일본의 전쟁배상으로 접수하고, 남한을 미국의 과잉생산 상품의 시장으로 삼고자 생산을 정지하거나, 또는 그 시설을 파괴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생산시설의 태반이 가동 중단되었고 실업, 반실업의 수는 500만 명이 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상승하였다. 대중의 생활은 무참히 파괴되어 갔고, 쌀 확보 등 생존을 위한 처절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1946년, 해방이 된지 1년이 지났다. 1946년의 물가는 1944년에 비해 92배로 폭등했으나 임금은 그에 비해 1/13밖에 오르지 않았다. 1946년 1월에 쌀 한 말에 180원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올랐다. 농민들은 일제 식민지시기에도 없던 하곡(보리쌀) 공출까지 강요당하자 불만이 높아졌다. 9월 철도파업이 시작되기 전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24건의 파업에 노동자 3천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농민들은 7월부터 하곡(보리쌀)수집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9월 13일 경성철도공장의 3,000여 노동자들은 급등하는 물가와 심각한 식량난 때문에 종전과 같은 생활비의 절반도 안 되는 급료로는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쌀 배급과 임금인상·대우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을 서면으로 미군정청 운수부 철도국장 맥클라인에게 제출하였다. 경성공장 노동자들의 궐기에 호응하여 전기수선장, 건축구, 통신구, 부산지구, 전남지구 철도노동자들도 각각 직장대회를 소집하고 일급제 반대 외 4항목 요구투쟁에 보조를 함께했다.
운수부장에게 제출한 요구서에 대한 답변이 없자, 조선철도노조는 ‘지방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남조선 철도종업원 대우개선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기존의 요구 외에 ‘급식을 종전과 같이 계속할 것,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 등을 덧붙여 운수부장에게 제출하고 산하 노동자들에게 24일부터 총파업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