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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1999년 서울동차 투쟁

    1998년 3월 철도노조 단위 선거를 통해 새로이 당선된 서울동차지부 집행부가 1998~1999년까지 ‘작업장 민주화, 열차안전 공공성 확보’ 현장 투쟁을 진행했다. 기존 어용노조 민주화를 위한 선거 대응 중심이었던 민주세력의 활동을 넘어 일터 민주화 요구를 걸고 조합원 참여를 조직하며 현장 투쟁을 진행한 것이다.

    부조리하고 권위적인 현장문화가 횡횡하던 당시 ‘작업 공구 적시 지급, 연병가 사용 보장, 군대식 점호 금지’ 등의 조합원 요구를 걸고 기존 ‘건의’식 노사간담회를 폐지, 철도노조 최초 지부 단위 ‘노사협의회’를 진행, 협의와 합의사항에 대한 점검 및 이행 투쟁을 벌여 현장 노동조건과 함께 군대식 직장 문화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공공기관 노동자로서 ‘열차 안전 확보’라는 사회공공성 의제를 철도 현장에서 최초로 제기하고 적극 대응, 투쟁하였다. 철도청에서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던 보수품 유용(고장 수리에 필요한 부품이 없어 대기 차량이나 중장비를 받은 차량에서 부품을 떼어내 다른 차량에 붙이는 ‘땜질 정비’를 일컬음), 전동차 A/S, 축상발열 사고에 대해 해결을 촉구하고 이를 언론과 시민단체에 공익제보해 사회적 여론을 조성했다.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지부 간부들은 표적 징계를 당했으나 조합원들의 현장 투쟁과 언론보도에 따른 여론에 따라 1차 부당전출 징계를 저지시켰다. 축상발열 사고에 대한 지부의 대응이 이어지자 철도청은 특별감사를 통해 투쟁을 주도한 지부 간부 3명을 파면하고 2명을 감봉, 전출하는 탄압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동차지부 간부, 조합원뿐 아니라 서울지역 민주파 지부와 활동가들이 함께해 이 투쟁을 지원, 연대했다.

    2년간의 현장투쟁은 징계와 해고로 마무리되었지만, 조합원 중심의 참여와 투쟁이라는 민주노조 운영의 모범사례를 만들어냈고 ‘시민안전’이라는 사회공공성 의제를 철도 현장에서 최초로 제기, 투쟁했으며 철도 민주진영의 연대와 단결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목차
    처음으로
    배경
    경과
    결과와 의미

    1. 배경

    1998년 서울동차지부의 간부들은 민주노조는 집행부 교체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투쟁을 통한 일터의 민주화와 함께 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부조리하고 권위적인 현장을 바꾸기 위한 일상활동과 투쟁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지부 간부들은 ‘작업장갑 추가 지급, 공구 적시 지급, 복지기금 유용 금지, 연·병가 사용 보장, 하루 세 번 군대식 점호 금지, 욕설 금지 인격적 대우’ 등 조합원들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요구를 해결하고 철도 현장에서 반복되던 비인간적이고 후진적인 관행을 바꾸고자 했다. 지부는 이를 위해 지부 소식지 ‘서울동차’를 통해 현장의 쟁점사안을 조사, 분석한 뒤 소식지에 싣고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요구안으로 정리했다. 정리된 요구안은 철도청과의 교섭을 통해 하나씩 관철되었으며 조합원들의 노조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그만큼 커졌다. 이후 열차 안전에 대한 철도청 간부 표적 징계에 맞서 벌어진 대응과정에서 조합원들은 리본달기, 100%에 가까운 동의 서명, 매일의 항의 집회와 농성 참여 등 현장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가는 주체가 되었다.

    한편 1998년 8월, 12월 지부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촉구한 ‘보수품 유용, 열차 제작사 A/S 요구, 축상발열’ 문제들은 승객인 시민 안전과 직결되는 사항이었다. 고장과 사고가 빈번해도 철도청은 개선보다는 책임회피, 축소, 은폐로 사고를 덮어왔던 것이 업무관행이었다. 지부는 현장의 작업조건 개선 뿐 아니라 공공기관노동자로서 안전한 철도를 위한 요구와 대책을 스스로 마련하고 이를 철도청에 적극 제기했다. 철도 현장에서의 최초의 사회공공성 요구 투쟁을 진행한 것이다. 지부는 이후 적극적인 언론 제보와 대응을 통해 이를 사회적으로 알려내고 철도청의 기존 무안전 대책에 제동을 걸었다.

    2. 경과

    • 서울동차사무소가 검수원들에게 도시통근형동차 엔진 시동모터를 유용 수리하라는 지시를 내림. 이에 검수원들은 “당일 업무가 많고, 긴급한 작업도 아니므로 제작사의 하자보수 규정을 검토한 후 처리하자”며 작업 보류를 요청함. 지부는 차량 구매계약서를 검토하고 제작사를 방문하며 하자보수 책임 문제를 공식 제기했지만, 사측은 검수원들의 문제 제기를 ‘작업거부’로 몰아감. 해당 전기반원 7명에게 경위서 제출을 요구했고, 검수원들이 무단으로 업무를 거부했다고 주장함.

    • 사무소 ‘검수업무 분담 지정’이라는 공문을 통해 노조 간부들에 대한 전보 및 근무 변경을 단행함. 10월 2일부로 황하일 지방본부대의원 및 조직부장을 의정부 주재로 전출하고, 노보 편집장 윤윤권은 검수 갑반으로, 교선부장 황효열은 검수 승무로 근무 변경시킴.

    • 서동지부가 노조탄압에 맞선 전면 대응을 결의함. 지부는 ‘보복 인사 조치 철회’, ‘문제 관리자 인사 조치’, ‘올바른 하자 보수 시행’ 등 세 가지 요구안을 내걸고 징계 당사자들은 부당전출을 거부함. 현장투쟁조직부, 선전부, 연대투쟁부, 법률대응부, 재정부 등으로 구성된 지부 투쟁기구를 정비하고 노동부 진정, 대자보 게시, 언론 보도자료 배포, ‘서울지역 노조탄압 대책위’ 구성 등 다각적 대응을 벌임. 조합원 조별 토론회, 리본 달기, 구호 제창, 족구대회, 화장실 낙서 투쟁에 이어 부당한 인사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에는 전체 조합원의 98%가 참여함. 서울기관차, 청량리 객화차 등 서울지역 9개 지부와 7개 기관차 지부도 공동투쟁 결의문을 발표하며 연대에 나섬.

    • 서울지방청장과 서울지방본부위원장의 중재로 합의가 이루어짐. 합의 내용은 ▲황하일은 의정부 주재 1개월 근무 후 복귀 ▲나머지 2인의 근무변경 원상 복귀 ▲하자보수 문제는 본부-지방청 차원에서 단계별로 조치 등이었음.

    • 하루 동안 서울-포항 간 제58열차 876호를 시작으로, ‘축상발열’ 사고가 세 건이나 연이어 발생함.

    • 철도청이 ‘긴급 업무 지시’와 ‘열차 안전 운행을 위한 특별 지시’ 공문을 발송함. 이에 따라 서울동차사무소를 비롯한 각 지역 새마을호 운용 사무소에서는 모든 차량의 축상 커버를 분해하고 점검하는 작업이 진행됨.

    • 시민단체 ‘도시연대’가 축상발렬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함. KBS 9시 뉴스를 포함한 방송 3사와 주요 일간지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됨.

    •  MBC 뉴스데스크가 서동지부가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새마을호 열차의 ‘보수품 유용’ 실태를 보도함.

    • 철도청이 서울동차사무소에 대해 2주간의 ‘특별 복무기강 감사’에 들어감.

    • 서울지역 5개 지부 지부장과 서울지방본부 대의원들이 긴급 연석회의를 열고 투쟁기금 모금과 연대집회 개최를 결의함.

    • 철도청이 황하일, 윤윤권, 황효열, 조항민, 석명한 등 서동지부 간부 5명에게 징계 의결 요구서를 발송함.

    • 서동지부 간부 7명이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서동지부 항의집회와 준법투쟁에 들어감.

    • 철도청 징계위원회를 개최함. 징계위 장소에서 징계 대상자 가족과 조합원 30여 명이 구호를 외치며 연좌 농성을 벌임.

    • 철도청이 징계 결과를 발표함. 황하일(조직부장), 윤윤권(노보 편집장), 황효열(교선부장) 등 3명은 파면되었고, 조항민(부지부장), 석명한(조사부장)은 감봉 3개월 처분과 함께 각각 동해차량, 순천차량으로 비연고지 전출됨.

    • 서동지부 ‘내부고발자 탄압과 철도 안전’을 주제로 기자회견을 개최함. SBS, MBC, KBS는 물론 한겨레, 연합뉴스, 노동자신문 등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됨.

    • 해고자 3명이 서울역광장에서 ‘부당징계 철회와 열차 안전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시위를 시작함. 서울역 시위는 12월까지 8개월간 이어지다가 2000년 직선제 공투본 시작과 함께 마무리됨.

    • 참여연대가 최초로 ‘공익제보자에 대한 공익소송’을 제기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행정소송 무료 변론에 나섬

    3. 결과와 의미

    서울동차지부는 기존 어용노조 민주화를 위한 선거 대응 중심이었던 민주세력의 활동 방식을 넘어 ‘작업장 민주화, 열차안전 공공성 확보’를 위해 2년간의 끈질긴 현장 투쟁을 진행하였다.

    어용노조 시절, 철도노조의 지부 단위 활동은 사실상 전무했다. 따라서 부조리하고 군대식 권위적 업무통제가 일상다반사인 철도 현장에서 조합원들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요구를 하나씩 해결하며 민주노조의 모범적 운영 사례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현장문제 사안을 조사, 분석한 뒤 그 내용을 지부 소식지 『서울동차』에 싣고 다시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요구안을 정리했다. ‘작업 공구 적시 지급, 연병가 사용 보장, 군대식 점호 금지’ 등의 조합원 요구를 걸고 철도청과 교섭과 투쟁을 병행했다. 마침내 기존 ‘건의’식 노사간담회를 폐지, 철도노조 최초 지부 단위 ‘노사협의회’를 진행, 협의와 합의 사항에 대한 점검 및 이행 투쟁을 벌여 현장 노동조건과 함께 군대식 직장 문화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1998년 8월, 보수품 유용과 전동차 A/S에 대해 철도청에 문제를 제기하자 철도청은 황화일, 황효열, 윤윤권 3인의 지부 간부를 타 사업소로 부당전출했다. 이에 지부는 10월 1일부터 노조 탄압에 맞선 전면 대응을 결의하고 실천했다. 각 대응부서를 설치해 투쟁기구를 정비하고 노동부 진정, 대자보 게시, 언론 보도자료 배포, ‘서울지역 노조탄압 대책위’ 구성 등 다각적 대응을 벌여나갔다. 현장에서는 조합원 조별 토론회, 리본 달기, 구호 제창, 족구대회, 화장실 낙서 투쟁을 벌이고 부당한 인사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에는 전체 조합원의 98%가 참여했다. 또한 서울지역 9개 지부와 7개 기관차 지부도 공동투쟁 결의문을 발표하며 연대에 나섰다. 한편 완강한 현장투쟁과 비위 사실에 대한 언론 취재와 보도가 시작되자 10월 13일 부당징계자 원상 복귀 합의를 쟁취한다.

    1998년 12월 11일, 운행 중인 새마을호 열차 바퀴에서 축상 발열로 화재가 발생하는 사고가 났고 이후 무더기로 축상발열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안전에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사고에 대해 철도청은 이 사고를 축소, 은폐하는 데 급급했고 승객 목숨을 담보로 열차 운행을 강행했다. 지부는 사태의 심각성에 따라 철저한 안전대책 마련과 문제차량 운행중단을 촉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 정리해 보고서를 만들어 언론과 시민단체에 공익제보했다. 연말 시민단체의 기자회견 개최 등 방송 3사와 주요 일간지에 대대적 보도가 잇따랐고 해를 넘긴 2월, 보수품 유용 실태까지 방송보도되자 2월 24일 철도청은 서울동차사무소를 대상으로 ‘특별 복무기강 감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특별감사는 공익제보를 한 지부 현장간부들에 대한 표적 징계가 목적이었다. 이에 지부와 민주파 지부들은 4월부터 징계 저지 투쟁을 집중적으로 펼쳤다. 철도청장에게 실상을 알리는 편지 발송했으며, 서울지역 민주파지부 연석회의 개최를 통해 투쟁기금 조성과 서울지역 조합원 항의집회를 개최했고, 7인 간부 단식농성, 4월 22일 철도청 징계위 장소 항의 연좌농성, 매일의 지부 조합원 규탄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철도청은 4월 28일 황하일(조직부장), 윤윤권(노보 편집장), 황효열(교선부장) 3명을 파면시키고, 조항민(부지부장), 석명한(조사부장)에 대해 감봉 3개월 처분과 함께 각각 동해차량, 순천차량으로 비연고지 전출 징계를 내렸다. 징계 당사자들은 5월 6일부터 서울역광장에서 부당해고와 부당전출의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시위를 연말까지 연일 개최했다. 서울지역 민주파 활동가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공동 대응을 지속했고 해고자 후원회를 구성해 꾸준한 지원을 이어갔다. 9월에는 참여연대가 ‘내부고발자에 대한 탄압’에 대해 기자회견 개최와 함께 적극적인 법률 지원을 시작했다. 주요 방송사들이 보도를 이어가고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해 ‘열차안전과 관련한 공익제보자 탄압’이 세상에 알려지고 우호적 여론이 형성되었다.

    한편 해고자 세 명 중 윤윤권과 황효열은 행정소송 1심에서 승소해 복직했으나, 철도청은 재징계를 통해 정직 3개월 처분을 내렸고 두 사람은 각각 망우제어와 수원시설로 전출되었다. 1심에서 패소했던 황하일은 2심에서 승소했지만,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해고가 확정되었다. 한편, 비연고지로 전출되었던 석명한은 민주철노 출범 이후 원소속으로 복귀했으나, 조항민은 끝내 민주철도노조의 탄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2년간의 서울동차 투쟁은 여타 노조 민주화 투쟁의 결과처럼 징계·해고자가 발생되는 탄압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지부 활동가들의 헌신적 활동과 조합원들의 공동실천으로 당시 철도 현장에서 보기 드물었던 작업장 민주화를 위한 일상투쟁의 모범사례가 되었고 철도 민주파 활동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또한 열차안전에 대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전면화해 공공성 의제를 최초로 제기했으며 서울지역 민주파 지부들의 연대와 지원을 촉발시키고 다음 해 직선제 공투본 투쟁으로 모여지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참고자료

    - 황하일, 「작은 투쟁, 큰 깨달음의 서울동차 투쟁」, 『철도노동조합 창립 60주년 기념자료집 ‘60년 걸어온 철길’』, 2005.
    - 김병구, 「철도 민주노조 건설의 역사 -저항과 연대·헌신의 역사 : 94년 6·23 파업 이후부터 2001년 선거투쟁까지」, 『철도노동조합 창립 60주년 기념자료집 ‘60년 걸어온 철길’』, 2005.
    - 『철도 민주노조 운동사 : 99년 서울동차 투쟁 자료집』, 노동자역사한내 문서번호 HNi66351, 1999.
    - 참여연대, 「보도자료와 의견서 : 1998년 철도 안전 문제 제보한 검수원 5인에 대해 코레일의 사과와 피해 회복 방안 마련 요구」, 2018.5.14.
    - 전국철도노동조합 역사편찬위원회, 『철도노조 80년사 2』, 한내,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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