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차지부는 기존 어용노조 민주화를 위한 선거 대응 중심이었던 민주세력의 활동 방식을 넘어 ‘작업장 민주화, 열차안전 공공성 확보’를 위해 2년간의 끈질긴 현장 투쟁을 진행하였다.
어용노조 시절, 철도노조의 지부 단위 활동은 사실상 전무했다. 따라서 부조리하고 군대식 권위적 업무통제가 일상다반사인 철도 현장에서 조합원들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요구를 하나씩 해결하며 민주노조의 모범적 운영 사례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현장문제 사안을 조사, 분석한 뒤 그 내용을 지부 소식지 『서울동차』에 싣고 다시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요구안을 정리했다. ‘작업 공구 적시 지급, 연병가 사용 보장, 군대식 점호 금지’ 등의 조합원 요구를 걸고 철도청과 교섭과 투쟁을 병행했다. 마침내 기존 ‘건의’식 노사간담회를 폐지, 철도노조 최초 지부 단위 ‘노사협의회’를 진행, 협의와 합의 사항에 대한 점검 및 이행 투쟁을 벌여 현장 노동조건과 함께 군대식 직장 문화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1998년 8월, 보수품 유용과 전동차 A/S에 대해 철도청에 문제를 제기하자 철도청은 황화일, 황효열, 윤윤권 3인의 지부 간부를 타 사업소로 부당전출했다. 이에 지부는 10월 1일부터 노조 탄압에 맞선 전면 대응을 결의하고 실천했다. 각 대응부서를 설치해 투쟁기구를 정비하고 노동부 진정, 대자보 게시, 언론 보도자료 배포, ‘서울지역 노조탄압 대책위’ 구성 등 다각적 대응을 벌여나갔다. 현장에서는 조합원 조별 토론회, 리본 달기, 구호 제창, 족구대회, 화장실 낙서 투쟁을 벌이고 부당한 인사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에는 전체 조합원의 98%가 참여했다. 또한 서울지역 9개 지부와 7개 기관차 지부도 공동투쟁 결의문을 발표하며 연대에 나섰다. 한편 완강한 현장투쟁과 비위 사실에 대한 언론 취재와 보도가 시작되자 10월 13일 부당징계자 원상 복귀 합의를 쟁취한다.
1998년 12월 11일, 운행 중인 새마을호 열차 바퀴에서 축상 발열로 화재가 발생하는 사고가 났고 이후 무더기로 축상발열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안전에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사고에 대해 철도청은 이 사고를 축소, 은폐하는 데 급급했고 승객 목숨을 담보로 열차 운행을 강행했다. 지부는 사태의 심각성에 따라 철저한 안전대책 마련과 문제차량 운행중단을 촉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 정리해 보고서를 만들어 언론과 시민단체에 공익제보했다. 연말 시민단체의 기자회견 개최 등 방송 3사와 주요 일간지에 대대적 보도가 잇따랐고 해를 넘긴 2월, 보수품 유용 실태까지 방송보도되자 2월 24일 철도청은 서울동차사무소를 대상으로 ‘특별 복무기강 감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특별감사는 공익제보를 한 지부 현장간부들에 대한 표적 징계가 목적이었다. 이에 지부와 민주파 지부들은 4월부터 징계 저지 투쟁을 집중적으로 펼쳤다. 철도청장에게 실상을 알리는 편지 발송했으며, 서울지역 민주파지부 연석회의 개최를 통해 투쟁기금 조성과 서울지역 조합원 항의집회를 개최했고, 7인 간부 단식농성, 4월 22일 철도청 징계위 장소 항의 연좌농성, 매일의 지부 조합원 규탄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철도청은 4월 28일 황하일(조직부장), 윤윤권(노보 편집장), 황효열(교선부장) 3명을 파면시키고, 조항민(부지부장), 석명한(조사부장)에 대해 감봉 3개월 처분과 함께 각각 동해차량, 순천차량으로 비연고지 전출 징계를 내렸다. 징계 당사자들은 5월 6일부터 서울역광장에서 부당해고와 부당전출의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시위를 연말까지 연일 개최했다. 서울지역 민주파 활동가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공동 대응을 지속했고 해고자 후원회를 구성해 꾸준한 지원을 이어갔다. 9월에는 참여연대가 ‘내부고발자에 대한 탄압’에 대해 기자회견 개최와 함께 적극적인 법률 지원을 시작했다. 주요 방송사들이 보도를 이어가고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해 ‘열차안전과 관련한 공익제보자 탄압’이 세상에 알려지고 우호적 여론이 형성되었다.
한편 해고자 세 명 중 윤윤권과 황효열은 행정소송 1심에서 승소해 복직했으나, 철도청은 재징계를 통해 정직 3개월 처분을 내렸고 두 사람은 각각 망우제어와 수원시설로 전출되었다. 1심에서 패소했던 황하일은 2심에서 승소했지만,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해고가 확정되었다. 한편, 비연고지로 전출되었던 석명한은 민주철노 출범 이후 원소속으로 복귀했으나, 조항민은 끝내 민주철도노조의 탄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2년간의 서울동차 투쟁은 여타 노조 민주화 투쟁의 결과처럼 징계·해고자가 발생되는 탄압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지부 활동가들의 헌신적 활동과 조합원들의 공동실천으로 당시 철도 현장에서 보기 드물었던 작업장 민주화를 위한 일상투쟁의 모범사례가 되었고 철도 민주파 활동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또한 열차안전에 대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전면화해 공공성 의제를 최초로 제기했으며 서울지역 민주파 지부들의 연대와 지원을 촉발시키고 다음 해 직선제 공투본 투쟁으로 모여지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참고자료
- 황하일, 「작은 투쟁, 큰 깨달음의 서울동차 투쟁」, 『철도노동조합 창립 60주년 기념자료집 ‘60년 걸어온 철길’』, 2005.
- 김병구, 「철도 민주노조 건설의 역사 -저항과 연대·헌신의 역사 : 94년 6·23 파업 이후부터 2001년 선거투쟁까지」, 『철도노동조합 창립 60주년 기념자료집 ‘60년 걸어온 철길’』, 2005.
- 『철도 민주노조 운동사 : 99년 서울동차 투쟁 자료집』, 노동자역사한내 문서번호 HNi66351, 1999.
- 참여연대, 「보도자료와 의견서 : 1998년 철도 안전 문제 제보한 검수원 5인에 대해 코레일의 사과와 피해 회복 방안 마련 요구」, 2018.5.14.
- 전국철도노동조합 역사편찬위원회, 『철도노조 80년사 2』, 한내,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