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부터 군사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과 농업경제 해체 및 농촌인구의 도시 이동에 따라 임금노동자들의 규모는 광공업, 제조업, 서비스업, 사회간접자본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리지 못하고 노동자들은 한계 이하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그리고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겨우 생존을 유지하며 생활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한마디로 기아임금 수준이었다. 도시근로자의 생계비에서 음식물비가 차지하는 비중, 즉 엥겔계수는 1960년 이후 계속 증가하여 1964년에는 60.5%라는 절대 빈곤 수준을 나타냈다. 그 이후 낮아지기는 했지만 1971년에도 41.4%를 차지했다. 중소기업 노동자의 생활 수준은 훨씬 더 참혹했다.
한편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정책하에서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이로부터 1960년대 노동시간은 주당 50시간을 넘어 60시간에 육박했다. 한편 급속한 광공업의 발달로 산업재해와 직업병이 해마다 증가해 산업재해자 수와 규모는 1964년 이후 1971년까지 30배 가까이 늘어났고 사망자도 같은 기간에 비해 21배나 급증했다. 이것도 공식 통계에 의한 것으로 은폐된 각종 임금·노동조건과 산재사고를 고려하면 그 실태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철도노동자의 상태 역시 저임금 빈곤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다음과 같은 당시 언론 기사를 보도라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집계에 의한 서울 시내 노동자 평균임금은 5,172원인 바 이는 노동자의 평균생계비 11,410원에 6,200여 원이 미달하는 적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매달 늘어가는 적자 생활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산의 일부를 팔거나 식량을 줄이는 등 초긴축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서울 기관차사무소 소속 조중화(48세)의 경우는 기관차 수리공으로 ‘왜정 때부터 취직하여 26년째 자신이 인간 기관차와 같이 일을 하여도 한 달의 임금은 고작 4,000원 남짓한 것으로 실로 살고 있다는 것이 기적과도 같다’ 했다. 여덟 식구 6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그는 생활에 쪼들리다 못해 국민학교에 다니는 삼 남매만 빼놓고 위로 삼 남매는 하는 수 없이 학업을 중단시켰다는 것으로 울음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인 생활로 친구도 잃고 담배 한 개비도 마음 놓고 피지 못하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으로, 우선 최저한도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10,000원의 임금을 절규했다.” (■ 어느 언론인지 신문기사 출처 추가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