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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년 생활급 확보 투쟁

    철도 노동자들의 열악한 저임금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1963년 9월 철도노조는 2차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대폭적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을 결의하고 ‘생활급확보대책위원회(생활급대책위)‘를 구성했다. 3개월간의 교섭을 진행하고 쟁의행위찬반투표를 실시해 조합원 98%의 찬성으로 파업을 예고했다. 해를 넘긴 교섭 끝에 철도청과 애초 요구였던 100% 인상에 못 미치는 40% 임금인상에 합의해 쟁의를 마무리했다.

    목차
    처음으로
    배경
    경과
    결과와 의미

    1. 배경

    1960년대 초반부터 군사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과 농업경제 해체 및 농촌인구의 도시 이동에 따라 임금노동자들의 규모는 광공업, 제조업, 서비스업, 사회간접자본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리지 못하고 노동자들은 한계 이하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그리고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겨우 생존을 유지하며 생활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한마디로 기아임금 수준이었다. 도시근로자의 생계비에서 음식물비가 차지하는 비중, 즉 엥겔계수는 1960년 이후 계속 증가하여 1964년에는 60.5%라는 절대 빈곤 수준을 나타냈다. 그 이후 낮아지기는 했지만 1971년에도 41.4%를 차지했다. 중소기업 노동자의 생활 수준은 훨씬 더 참혹했다.

    한편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정책하에서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이로부터 1960년대 노동시간은 주당 50시간을 넘어 60시간에 육박했다. 한편 급속한 광공업의 발달로 산업재해와 직업병이 해마다 증가해 산업재해자 수와 규모는 1964년 이후 1971년까지 30배 가까이 늘어났고 사망자도 같은 기간에 비해 21배나 급증했다. 이것도 공식 통계에 의한 것으로 은폐된 각종 임금·노동조건과 산재사고를 고려하면 그 실태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철도노동자의 상태 역시 저임금 빈곤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다음과 같은 당시 언론 기사를 보도라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집계에 의한 서울 시내 노동자 평균임금은 5,172원인 바 이는 노동자의 평균생계비 11,410원에 6,200여 원이 미달하는 적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매달 늘어가는 적자 생활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산의 일부를 팔거나 식량을 줄이는 등 초긴축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서울 기관차사무소 소속 조중화(48세)의 경우는 기관차 수리공으로 ‘왜정 때부터 취직하여 26년째 자신이 인간 기관차와 같이 일을 하여도 한 달의 임금은 고작 4,000원 남짓한 것으로 실로 살고 있다는 것이 기적과도 같다’ 했다. 여덟 식구 6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그는 생활에 쪼들리다 못해 국민학교에 다니는 삼 남매만 빼놓고 위로 삼 남매는 하는 수 없이 학업을 중단시켰다는 것으로 울음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인 생활로 친구도 잃고 담배 한 개비도 마음 놓고 피지 못하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으로, 우선 최저한도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10,000원의 임금을 절규했다.” (■ 어느 언론인지 신문기사 출처 추가할 것)

    2. 경과

    • 용산 철우회관에서 철도노조 2차 전국대의원대회가 개최되었다. 2일차인 28일 속개된 회의에서 긴급 동의안건으로 ‘생활급 확보 투쟁 건’을 처리하고 권한을 집행부에 위임했다. 또한 ‘무지와 빈곤을 일소하며, 최저생활이 보장되는 기본급 인상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강철같이 단결한다’는 요지의 대회 결의문을 채택했다.

    • 정기대의원대회의 결의에 따라 노조 산하 ‘생활급확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후 4차례의 회의를 통해 요구안을 확정했다.

    • 임금인상 요구서를 철도청에 제출하고 긴급노동협의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 1차 임금교섭을 진행했다.

    • 2차 임금교섭을 진행했다. 교섭에서 철도청은 ‘임금 100% 인상의 요구는 타당하나 철도청 단독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단독으로 보수를 인상할 수 있는 제도 변경을 위한 기구 설치로 기구개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 노사 비공식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별다른 의견 접근 없이 정기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평화적인 교섭 기간 만료일인 12월 20일이 경과했다.

    • 철도노조가 이날까지 기본급 인상 요구에 대한 수락 시기를 최종적으로 통보할 것을 철도청에 요구했으나 철도청은 ‘기본 급여 인상 시기 및 수락 여부는 현재로서는 명시할 수 없다’는 내용을 노동조합에 통지했다.

    • 철도노조가 생활급 1만 원으로의 대폭 인상 이유와 노조의 투쟁방침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일간지에 게재했다.

    • 철도노조가 철도청을 쟁의당사자로 하는 쟁의신고를 노동청에 제기했다.

    • 중앙노동위원회가 철도노조가 제기한 쟁의에 대해 적법 판정을 내리고 노사 냉각기간을 제시했다.

    • 철도노조가 지방유세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를 통해 쟁의목적 관철을 위한 조합원 대상 유세를 진행했다.

    • 철도청장이 비공식 교섭에서 ‘이 쟁의는 오직 정책적인 해결에 의존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답변을 고수했다.

    • 철도노조가 조합원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해 조합원 98%가 찬성했다.

    • 철도노조가 제6차 중앙투쟁위원회를 열어 투쟁계획인 쟁의행위 요강을 통과시켰다.

    • 법정 냉각기간이 종료되는 이 날, 철도청이 쟁의조정법에 의한 중재를 요청했으나 철도노조는 국유철도 단체협약 제49조를 위반하는 것이라며 중재를 거부했다. 이후 철도청이 재차 중앙노동위원회에 중재를 회부, 중앙노동위원회가 3차에 걸쳐 철도노조에 출석요구서를 보냈으나 철도노조는 당시 중앙노동위원회 근로자위원 3명이 총사퇴한 상황에서 공정한 중재가 불가능하다며 중재를 재차 거부했다.

    • 노동청 요청에 따라 현업기관인 철도, 체신, 전매 등의 3개 노조 간부들이 참석한 협상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노동청장이 철도노조의 100% 인상 요구에 대한 타협안으로 5% 내지 7%를 제안했고 노조 대표들이 협상장을 퇴장했다.

    • 교통부장관실에서 교통부장관, 철도청장과 비공식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7% 인상 제안이 반복되어 다시 결렬되었다.

    • 철도노조가 중앙투쟁위원회 결의로 쟁의행위에 돌입할 것을 결정하고 조직 내외에 이를 천명했다.

    • 철도노조의 파업 선언에 대해 철도청이 비공식 교섭을 요청하여 일주일간의 임금교섭이 진행되었다.

    • 100% 요구안에 못 미치는 40% 인상 수준으로 생활급 인상이 합의되어 철도청 회의실에서 조인식을 진행하고 5개월에 걸친 생활급 확보 투쟁을 마무리했다.

    3. 결과와 의미

    5개월여의 생활급 확보 투쟁을 통해 2월 19일 철도청과의 ‘임금인상에 관한 협정서’의 주요 내용은 “기본임금(직책수당 포함)의 10%를 현업수당으로 소급 지급하고 이후 일반공무원의 처우개선에 따라 동액을 기본급으로 지급한다. 철도청은 현업수당을 증급하기 위해 이를 정부 추경예산에 반영한다”로 이를 통해 40% 가까이 임금이 인상되었다.

    철도노동자들의 저임금·빈곤에 대한 불만과 고통이 1963~1964년의 생활급 확보 투쟁을 통해 폭발했다. 당시 폭등하는 물가와 산업노동자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으로 철도노동자들의 생계에 대한 위협이 갈수록 증가했기 때문이다. 반면 철도노조는 이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교섭과 투쟁계획을 세우지 못하다 9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 긴급 안건 발의를 통해 ‘생활급확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후 철도청과 5개월여 교섭을 진행했지만, 교섭만으로 진전된 결과를 도출할 수 없었다. 이에 떠밀려 철도노조는 사상 최초로 조합원 쟁의행위찬반투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는데 찬성률이 무려 98%에 달할 정도였으니, 현장조합원들의 분노와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노조는 당시 법적 쟁의 절차를 거치고 찬반투표와 수차례 회의와 성명을 통한 파업을 공언했지만, 막판 철도청과 특유의 비공식협의를 통해 애초 요구안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의 임금으로 합의했다. 이후 임금·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활동은 1968년 생활급 확보 투쟁, 1970년 생활급 확보 투쟁의 결과에서 보여지듯이 1964년의 과정과 결과(성명 발표-협의 진행-쟁의 선포-비밀교섭-합의)를 반복한다. 사안별로 노조가 명목상 각종의 투쟁위원회를 만들기는 했지만, 조합원들이 참여하고 의견을 모으는 방식이 아니었다. 조합원들은 대상화되어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소수 간부 중심의 청원, 비밀협의 방식의 활동이 굳어졌다. 또한 집회, 파업 등의 단체행동은 철저히 금지, 통제되는 노조의 임금·노동조건 개선 활동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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